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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현장교육 소감문 - 홍은진
  • 카테고리해외현장학습 소감문
  • 작성자admin
  • 날짜2017-02-03 17:22:03
  • 조회수96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홍은진

 

 

 

1. 원톄쥔 선생님 강연 소감문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사전교육 강의와 그 자리에서 소개 받은 『백년의 급진』에서 접한 이야기도, 접하지 못한 이야기도 있었다. 몇 개의 단락들에서 구체적인 내용들을 언급하는 일은 내게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다만 원톄진 선생님의 강연에서 받은 인상을 세 가지로 곱씹고 싶다. 

첫 번째, 중국의 역사 특히 근대사를 구성하면서 국제 관계 내 경제 정세를 중점적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특정 국가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경제사 자체를 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정치·제도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고려하는 논의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와 달리, 원톄쥔 선생님은 경제적 측면 혹은 하부 구조를 세세하게 탐구하면서 그리고 그 구조를 국제적 맥락 위에서 살펴보면서 자기 주장의 논거를 제시하고 있었다. 강연 시간에 ‘마르크스 경제학’의 타당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학우도 있었고, 방법론 자체에 대한 이론적인 논쟁이 분명 가능하리라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세계’ 경제가 개별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심대하다는 사실만을 받아들여도, 그리고 원톄쥔 선생님께서 언급한 구체적 사례와 통계의 설득력을 받아들여도, 선생님께서 재구성한 시각이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두 번째, 강연 시간에 선생님께서 단어 ‘교과서’를 반복해 사용하셨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교과서’, 특정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으며 곧잘 무반성적으로 수용되는 교과서의 담론은 추상적인 이념의 영향을 오직 중시하고, 그리고 구체적 사실을 간과하고, 물론 특정한 시각을 재생산하도록 종용한다. 학자로서 원톄쥔이 경제, 통계, 국제 관계를 포괄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참고하여 자신의 이론을 구성할 수 있었던 동기가 ‘교과서’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서 드러나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사범대학에 소속되어 있기도 하고, 철학사를 공부하고 싶기도 한 학생으로서 ‘플라톤은 어떠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떠하다’는 둥의 ‘교과서’ 담론들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되도록 진실에 부합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인식론적 당위에도, 주어지는 틀을 넘어서서 스스로 사유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 바람직하다는 교육관에도 부합하지 않는 ‘교과서’의 이야기들을 의심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연회가 있었던 날에 방문한 CSA 농장에서 학위 과정에 있던 선생님의 제자들이 직접 현장에서 몇 개월에 걸쳐 여러 체험을 하고 있던 모습과도 관련될 것 같았다.)

세 번째, 중국이 역동적인 공간으로 느껴졌다. 나는 ‘평등’은 바람직한 가치라고 생각하면서도 평등을 내세우는 사회주의는 나쁘거나 실패했을 뿐인 체제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세계 곳곳의 금융·경제 위기를 접하면서도 현재의 경제 체제나 정치 제제를 넘어서는 어떠한 체제들을 상상할 줄 모른다. “세계화”는 그 문제점이나 교과서처럼 가끔씩 떠들어 주면 그만이지, 정말로 거부해야 하는 대상으론 여기지 못 한다. 원톄쥔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면서, 내게는 이미 당연한 것들이 되어버린 가짜 문제들이, 롤즈이니 노직이니 강의실에서만 접했던 죽은 토론들이 중국에서는 당장의 문제로서 치열한 논제들로 떠올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국은 ‘제 3세계’ 개념으로 포착되지 않으면서 미국 등을 포함해 기존 ‘서구 열강’ 국가들이 걸어왔던 길과 다른 독자적인 사회·경제적 실험이 벌어지고 있는 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를 포착하는 데, 서구를 중심으로 발전해 온 학문적 틀이 불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중국에서 독자적인 학문적·사유적 틀이 구성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것일까.

일전에 과학사 교양 수업을 들으면서 ‘동아시아에 왜 과학혁명이 없었을까?’ 고민하였던 20세기 중국 학자들의 문제의식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이번 해외현장교육에서 사귄 친구 덕분에 방문한 서점에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철학’도 ‘서양철학’도 아닌 “세계철학” 영역에 꽂아 둔 중국을 만날 수 있었다. 과학혁명이나 서양철학이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열등감을 넘어서, ‘식민주의’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도 넘어서, 중국은 어떤 사회로 나아갈지 그 미래가 궁금해졌다. 비록 전공 분야는 아닐지라도 기회가 닿는 대로 원톄쥔 선생님의 시각을 꾸준히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쑨거 선생님 강연 소감문

 

다루어지는 지식이나 정보의 양을 오직 기준으로 삼아 따져본다면, 강연의 청취는 강연자의 저작 독서보다 나을 점이 없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연이 개최되고 강연을 청취하는 데 의의가 있다면, 그 의의의 본질은 지식이나 정보 자체에 있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쑨거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면서 다시 한 번 하였다. 

우리를 인솔해 강의실 문을 직접 열어 주었던 사람이 강단에 앉았을 때, 내 주위의 동료들은 하나같이 ‘저 분이 쑨거 선생님이셨어?’라는 반응을 보여 주었다. “석학” 소리를 듣는 사람이, 그것도 적지 않는 나이를 가진 학자가 외국에서 온 젊은 학생들을 위해 직접 강의실 문을 열어 주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물론 중년의 여성 학자를 만나는 일부터 드문 경험이었다.) 그렇게 자리에 앉은 선생님께서 강연을 시작하셨을 때, 시종일관 강연자가 통역가를 위해 발화의 속도와 발음을 조절하고 적절한 길이로 자기 발화를 끊는 모습에서 나는 배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려 깊은 모습들 사이로 눈빛을 빛내 주시는 선생님의 모습에 ‘반했다’는 나의 사적인 감흥에 의미가 있을까? 강연에서 다루어진 두 개의 주제 가운데 하나로서 “사회과학”의 한계와 “인문학”의 방법론이 논의되었는데, 선생님께서 설명하셨던 ‘인문학’이 내가 반했던 선생님의 사려 깊은 모습들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 감흥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 같다. 내가 느끼기에 선생님께서 보여 준 배려와 세심함은 모두 상대방의 처지와 마음에 대한 관심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내가 이해하기에 선생님께서 설명하셨던 ‘인문학’은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따라서 쉽게 예측될 수 없고 때때로 지극히 모순적인―인간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는 그러한 학문이었다.

이 주제를 통해 두 가지 개인적인 경험을 되새길 수 있었다. 첫 번째, 양적 연구 방법을 사용한 사회과학 논문들을 읽으면서 ‘사회과학은 자유의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라는 질문을 종국에 떠올렸던 경험이 떠올랐다. 예측가능성이니 설명력을 내세우는 ‘과학’과 ‘인간’의 관계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인간 종적인 견지에서는, 합리적인 이성과 불투명한 의지의 관계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선생님께서 던지신 화두가 반갑고도 무겁게 느껴졌다. 두 번째, 나의 진로에 대한 상념들이 떠올랐다. 대학이라는 제도 안에서 특정한 절차를 따라 “인문학” 내 분과학문을 공부하기로 합의하였다면, 제도가 요구하는 덕목들 역시 갖추기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한 것이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명시적으로 요구될 법한 “전문성”이나 “경쟁력” 외 다른 중요한 덕목·태도가 있다는 점을 다시 새길 수 있었다. 비록 잘 알지 못할지라도, 학부 수업들에서 내가 막연히 끌렸던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포착해 내던 자들이었다. 전통을 계승하면서 고유한 영혼론을 전개하였던 철학자들,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를 고민하였던 철학자들의 작업에 내가 호기심을 가지고 존경심을 표할 수 있는 까닭이 그들이 가졌던 ‘인간 이해’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주제는 ‘동아시아’ 개념에 대한 논의였다. 선생님께서 짤막하게 해 주셨던 이야기들은 크게 세 가지 단계로 구분되는 것 같았다. 첫 번째, 대립을 전제하는 이분법적 도식 ‘서구와 동아시아’이나 ‘미국과 아시아’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이다. 두 번째, 서구처럼 근대 민족 국가를 수립하려는 동아시아의 움직임에 대한 비판적·회의적 시각이었다. 두 단계에 대한 선생님의 주장 및 논거들을 나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세 번째 단계가 명시적으로 논의되지 못 했다는 점은 다소 아쉬웠다. ‘서구와 동아시아’와 같은 도식을 떨쳐내며 걷기 쉬운 길이 다름 아닌 ‘한국’이나 ‘중국’ 같은 민족 국가 이데올로기일 것 같은데, 이 길마저 거부하면서 어떻게 ‘동아시아’ 개념을 형성할 수 있을까? 강연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물음은 떠올랐고, 세 번째 단계이자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이 바로 쑨거 선생님께서 논문들에서 다루고 있었던 주제였다. 선생님의 강연은 당신의 견해를 당장 펼치기보다는 차분히, 사실은 치열한 질문들로 우리를 초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이 되고 교정을 걷다 소나무를 보면, 『논어』의 구절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러나 가방에는 영어로 번역된 철학책과 영어로 써진 라틴어 교과서가 있다. 그리고 나는 냉전의 잔재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한반도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쑨거 선생님의 정갈한 강연을 들으면서 나의 경험을 다시 구성하는 동시에 새로운 문제들로 초대 받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인문학을 하는 일’이 어떤 것일지 계속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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